퇴행성이라고 들으셨나요
못 낫는 병이라는 오해
진료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병원에서 퇴행성이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대개 그 뒤에는 체념이 붙습니다. 못 낫는 병이라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퇴행성은 노화와 같은 말이 아니고, 못 낫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숫자를 하나 보겠습니다. 무증상자 3,110명을 대상으로 한 2015년의 체계적 문헌고찰에서, 추간판 퇴행은 아무 증상이 없는 20세의 37%에서 발견됐습니다. 80세에서는 96%였습니다. 디스크 팽윤도 20세의 30%에서 발견됩니다. 저자들의 결론은 영상에서 보이는 퇴행성 소견의 상당수가 정상적인 노화의 일부이며 통증과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퇴행성 변화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지금의 통증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20대 육체노동자에게서도 퇴행성 변화를 봅니다. 그분들의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누적된 부하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퇴행성 질환은 생각보다 호전됩니다. 낫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개 회복보다 마이너스가 빠르게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수의 경우, 더 이상 마이너스를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악화가 멈추는 지점이 옵니다. 물론 부하와 무관하게 진행하는 질환도 있으므로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퇴행성"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손댈 수 있는 부분까지 포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자산으로서의 몸
옛 한의학 서적은 몸을 하나의 국가에 즐겨 비유했습니다. 『소문·영란비전론』에서 심장을 임금의 자리에, 폐를 재상의 자리에 놓고 각 장부에 관직을 배정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저는 지금 시대에는 사업체의 비유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 각자 물려받은 자산이 있습니다. 규모도 다르고 성질도 다릅니다. 체질이라 부르는 선천적 조건이 여기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초기 자본이 아니라 이후의 운영입니다.
자본으로 쌓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근육량, 심폐지구력, 규칙적인 식사, 안정적인 인간관계, 다룰 줄 아는 감정. 부채로 쌓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술과 담배, 과식, 움직이지 않는 시간, 해소되지 않은 스트레스, 과로, 부족한 수면.
하루 단위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날은 자본이 조금 쌓이고 어떤 날은 부채만 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수천 번 반복되고 나면 청장년기 이후 각자의 사업체 규모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건강한 형태로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다른 한쪽에서는 몸이 변형되고 장기 기능이 떨어지며 빠르게 노화하는 모습을 봅니다. 같은 나이에 말입니다.
이 직관에는 학술적 대응물도 있습니다. 신경내분비학에서 말하는 알로스타틱 부하(allostatic load)는 스트레스 대응 시스템이 반복 작동하면서 누적되는 마모를 가리킵니다. 말 그대로 부하가 적립되는 장부이고, 여기서 말하는 부채와 구조가 같습니다.
감가상각과 부채는 다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회계에는 부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가상각도 있습니다.
감가상각은 시간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발생하고 피할 수 없습니다. 연골이 얇아지고 추간판의 수분이 줄어드는 변화가 여기 해당합니다. 반면 부채는 선택의 결과이고,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력운동이나 충분한 수면처럼 상각 속도 자체를 늦추는 자본적 지출도 있습니다.
"퇴행성"이라는 말에 유독 절망이 따라붙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가상각만 보고 부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손댈 수 없는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지금 통증을 만들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손댈 수 있는 쪽에 있습니다.
숫자를 하나 더 보겠습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7년이지만, 아프지 않고 지내는 기간만 따지면 65.5년입니다. 차이는 18년입니다. 노년의학에서 말하는 노쇠(frailty)란 생리적 예비력이 고갈된 상태, 이 장부로 치면 자본잠식에 해당합니다. 그 18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병에 걸렸느냐가 아니라 순자산이 자립 가능한 수준 위에 남아 있느냐입니다.
한의원은 어디에 개입하는가
그렇다면 한의원은 이 장부의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부채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 자리가 아니라, 발생한 부채의 이자를 낮추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야근을 없애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부담이 몸에 남는 방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음주 후에는 혈관내피의 기능이 떨어지고 장 점막의 투과성이 높아지며 전신적인 염증 반응이 따라옵니다. 소화관의 회복을 돕고 염증 부담을 낮추는 개입이 가능한 지점입니다. 육체적·정신적 과로가 회복되지 않고 다음 날로 이월되는 것을 줄일 수 있고, 잠들기 어렵거나 자주 깨는 문제에 대해서도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부채를 대신 갚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부채가 더 비싸게 굴러가지 않도록 조건을 조정하고, 그렇게 확보한 여력으로 환자분이 스스로 자본을 쌓을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한의학의 강점은 바로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나
사회적 변화는 운동에서도 보입니다. 흔히 "웨이트 트레이닝 대신 기능성 운동이 뜬다"고들 하지만,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근력운동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해졌습니다. 근감소증을 막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저항운동이라는 것은 노년의학의 확고한 합의입니다.
달라진 것은 목적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에서, 혼자 계단을 오르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넘어지지 않기 위한 운동으로. 같은 스쿼트를 하더라도 겨냥하는 지점이 이동했습니다. 생활체육과 기능적 훈련이 각광받는 것은 근력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근력이 무엇에 쓰이는지를 다시 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관리하려는 것은 수명의 길이가 아니라 그 18년의 두께입니다. 퇴행성이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그것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장부를 한번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